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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인문학/인문 서적 리뷰

밀란 쿤데라 - 무의미의 축제

by 시와강아지 2020. 12. 17.

안녕하세요. 시와 강아지입니다.


오늘의 작품은 희대의 농밀함을 지닌 작가,

밀란 쿤데라의 2013년 발간작입니다.


그는 '의미'와 '무게'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전복시키는 것을 즐기는 듯 합니다.


자칫 무거운 역사의 시선을 '찰나적'인 것으로 폄하하기도 하며,

우리 삶의 가장 많은 순간을 차지하는 무의미함을 의미있게 되새기며 그러안는 따뜻한 시선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밀란 쿤데라가 아닌 신인작가가 『무의미의 축제』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출간했다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중은 어쩌면 거장의 작품 자체보다는 거장이 수 십년간 지속적으로 내비쳐 온 메세지에서 비롯된 아우라에 열광하는지도 모릅니다.


라멘집에서는 진득한 돼지육수를 기대하고

떡볶이집에서는 달콤한 양념을 기대하듯


우리는 밀란 쿤데라에게 삶에 대한 통념을 뒤흔드는 시선을 기대합니다.




매표소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는 줄에 선뜻 들어가 그 일부가 된다는 건 엄두도 못 내리라는 것을 벌써 알았다. 그는 사람들을, 지루함으로 딱딱하게 굳은 얼굴들을 쳐다보았고, 저 사람들의 몸과 떠드는 소리가 그림들을 다 뒤덮어 버릴 전시실을 떠올렸으며, 그래서 잠시 후 몸을 돌려 공원에 난 길로 접어들었다. 

그곳은 분위기가 훨씬 좋았다. 인간이 덜 많이 보이고 더 자유로워 보였다. 바빠서가 아니라 달리는 게 좋아서 뛰는 사람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거니는 사람들, 잔디밭에서 느릿느릿 이상한 동작을 하는 아시아 학생들이 있었고...

...라몽은 떠오르는 미소를 누르지 못하고서 계속 이 천재들의 공원을 천천히 거닐었다. 겸허한 그 천재들은 산책객들이 무심히 지나쳐 주는 덕분에 기분 좋게 자유를 느낄 것이다....


...마치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평온한 고요인 듯 라몽은 그런 무심함을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라몽은 샤갈전이 열리는 미술관을 코앞에 두고는

바로 옆 뤽상부르 공원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공원에서는 '천재적인 영혼'들이 자신들만의 예술을 하고 있었죠.


샤갈은 천재적인 작가이지만 수백명 대중의 시선과 시끄러운 논의에 뒤섞이는 순간, 그림의 아우라는 훼손됩니다. 

반면, 뤽상부르 공원에서 '느릿느릿 자신만의 이상한 동작을 하는 아시아 학생'에게는 그가 가진 '천재성'에 비해 시선이 전혀 쏠리지 않죠. 그는 스스로의 움직임에 집중을 할 수 있고, 덕분에 그의 움직임에는 '천재적인' 예술의 아우라가 부여됩니다.


라몽은 자신이 예술의 유일한 관객이 되는 순간에만 진정으로 그 작품을 향유할 수 있다고 믿는 듯 합니다.


'무의미'한 것을 '의미'있게 바라보는 일은 우리가 세상 유일한 관객이 될 수 있는 순간을 선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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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어느 날, ... 알랭은 파리의 거리를 천천히 지나는 중이었다. 아가씨들을 자세히 보니 아주 짧은 티셔츠 차림에 바지는 모두 아슬아슬하게 골반에 걸쳐져서 배꼽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남자를 유혹하는 힘이 이제는....몸 한가운데의 둥글고 작은 구멍에 총집중돼 있단 말인가 싶었다.


어떤 여자 목소리가 그(알랭)를 깨웠다.

"...배꼽이 없는 여자의 전형이 너에게는 천사지. 나한테는 하와, 최초의 여자란다. 하와는 배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한순간의 기분, 창조자의 기분에서 태어났어. 최초의 탯줄은 바로 그녀의 음부, 배꼽 없는 여자의 음부에서 나온거야....나는 최초의 여자의 배꼽 없는 작은 배에 뿌리 내린 그 나무의 전적인 소멸을 원한 거야...."


배꼽은 『무의미의 축제』를 관통하는 상징입니다. '배꼽으로 유혹하는 듯한 아가씨'에 대한 알랭의 단상은 소설의 첫장과 뒤편에 두 번이나 등장합니다. 

알랭은 기억이 희미한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일종의 환청을 듣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배꼽은 '최초의 여자 하와'로부터 우리가 비롯되었다는 상징이라고 말이지요.


알랭은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배꼽이란 우리 존재의 독자성을 모두 앗아가는, 이를테면 상품에 찍힌 상표와 같은 것일까. 


우리는 각자 참된 의미를 지녔고, 자신만의 개성으로 삶을 이뤄나가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언제든 우리를 몰개성으로 타락시킬 수 있는 '배꼽'의 지배를 받습니다. 소설에서 배꼽은 의미를 지닌 우리들의 '무의미'를 상징합니다. 


바로 의미와 무의미가 전복되며 뒤섞이는 지점입니다. 


제게 『무의미의 축제』는 "의미있는 존재들의 무의미한 축제"를 다룬 소설로 읽힙니다.


나는 의미있지만

너를 만나 무의미로 타락하게 됩니다.

너와의 만남에서 다시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하지만 혼자 갖는 의미는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너와 나만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무의미 축제의 장에서 우리는 서로를 그리운 듯 갈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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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배경은 다시 공원으로 돌아와, 광장에서의 소동이 한 편의 무대없는 연극으로 그려지며 마무리됩니다.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들이마셔 봐요. 다르델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무의미를 들이마셔 봐요, 그것은 지혜의 열쇠이고, 좋은 기분의 열쇠이며......."


나는 무의미의 바다에서 의미를 길어 내기 위해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배꼽으로 상징되는 자본, 명령과 복종, 시샘과 시선이라는 암초에 부딪혀 몰개성이라는 심해로 침몰할 수도 있습니다.


'배꼽'은 자본 증식을 위한 본능적인 방법을 설명해주고

아이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해 성공해야 한다는 동기를 심어주고

손쉽게 대중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군중 속의 축제에서 환락을 경험하게 합니다.


동시에 몰개성의 덫에 걸리게 만들어 버립니다


우주의 탄생과 소멸 사이에서 태어난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개성과 몰개성의 사이에 있는 것도 인간입니다.


『무의미의 축제』는 그 간극에서 벌어지는 축제를 다룬 소설로 읽힙니다.


시와 강아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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