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배고프고 내가 외로운 것보다 그가 배고프고 외로운 것이 더 아프다."
사랑하는 마음은 이 한 마디로 요약됩니다.
근데 왜 그리도 사랑에 대한 담론과 예술은 끝도 없이 생겨나고 회자되는 걸까요.
사랑을 하지 못하는 상태를 다시 사랑하는 상태로
돌리려는 길이 그리도 험난하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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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작가는 언제나 자유와 사랑을 강조해왔습니다.
시대에 결핍된 요소가 곧 인류 성장의 제한요인이라고 본다면,
전근대 사회의 그것은 신분과 기술이었을 것이고
근대에는 자본주의과 시민의식이었을 것입니다.
부족한 부분을 채워 인류는 발전을 해왔고
(적어도 저는 현재까지는 발전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그러길 희망합니다.
강신주 작가는 현 시대의 제한요인을 바로 자유와 사랑이라고 판단합니다. 자유와 사랑이 있다면 인류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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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자유와 사랑은 불가분의 개념입니다.
자유로운 자만이 사랑할 수 있고,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유로운 거라고.
사랑과 자유를 언제나 역설하던 그가 드디어
달콤하지만 끝맛이 진-한 사랑 단행본을 출간했습니다.
책의 목차를 정말 잘 나눠주셨지만
저작권이 허용하는 선에서
책의 초반부 중 저에게 와닿았던 내용을 위주로 전달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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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기를 넘어서는 순간, 그는 배고픔에 비견할 만한 새로운 고통에 빠져들고 마니까. 사랑은 '한 공기의 밥'과 같은 것이다."
그에게 더 퍼주려 했나요.
그가 원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한 공기 '이상'의 밥입니다.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가 원하지 않는 것을 주는 것은 그에겐 또 다른 고통일 겁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가 준 것이 그에게는 전혀 달갑지 않을 수도
있다는 '충격'을 감내할 줄 알아야한다는
의미로도 읽힙니다.
사랑에 대한 논지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삶을 가진 자가 곧 사람이고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
삶의 대부분은 고통으로 이루어집니다.
행복은 여름날 잠시 더위를 식히는 산들바람의
빈도로 찾아올 뿐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덜어주는 행동'입니다.
고통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단, 물 밖으로 꺼내주었더니 그가 육지를 달려 저 멀리 달아난다해도 어쩔 수 없는 것 또한 사랑입니다.)
"배고픈 사람을 더 배고프게 하지 않기! 우는 사람을 더 울게 하지 않기! 외로운 사람을 더 외롭게 하지 않기! 피곤한 사람을 더 피곤하게 하지 않기!"
'나'는 상대의 고통을 정말 느끼긴 했던 걸까요?
사랑한다는 전제 조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의 고통'을 느낄 줄 아느냐는 것입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의 마음을 아는 자만이
그를 구할 수 있습니다.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그가 1m 수심의 어린이 풀장에 있는 거라고.. 오바하는 거라고.. 오해하는 상황은 얼마나 끔찍한가요..
'"사랑의 핵심은 고통을 느끼는 것이고, 그렇게 느낀 고통이 가짜가 아니라 진짜라면 우리는 그 고통을 완화하려는 즉각적이고 자발적인 행동을 시작한다."
상대의 고통에도 행동이 즉각적이지 않다면
답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반증입니다.
"사랑이 연민과 다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연민은 행동을 낳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면, 우리는 상대방의 고통을 사무치게 느껴야 한다.
...상대방의 고통을 느꼈지만 완화시켜줄 수 없다면 노심초사하게 될 뿐이고, 그래서 그 고통을 침묵으로 더 아프게 받아들이게 된다.
..."파이팅!"이라는 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상대방의 고통과 무거움을 느끼는 사람은 어쩌면 당사자보다 더 고통스럽고 더 무거울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완화할 수 없음을 자책하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당신은 사랑하고 계신 겁니다. 자책한다는 건 사랑하는 이의 고통에 직면하는 것이니까요.
자책하는 당신은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할 것입니다. 물에 빠진 이를 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말하는 것으로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을 겁니다.
"사랑하는 상대방의 고통을 완화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에서 고개 돌리지 않고, 말로 희석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내가 휘청거릴 정도로 힘들다면, 상대방이 나에게 편히 기대고 있다고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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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논지는 '나'에서 '사회'로 확대됩니다.
관계는 "교향악단이 만드는 앙상블"과 같습니다.
너와 나, 그리고 수많은 요인들이 만났을 때
비로소 새벽의 어여쁜 이슬이 만들어집니다.
우린 타인을 비롯한 다른 존재들을 만났을 때에야
비로소 '이슬'을 맺을 수 있습니다.
사랑도 혼자할 수는 없는 것이죠.
"바깥세계와 접촉하는 잎에는 이슬이 맺힌다. 반대로 바깥세계와 차단되어 있다면, 예를 들어 실내에서 키우는 식물의 잎에는 이슬이 맺히기 힘들다.
...축축한 공기, 적당한 기후, 그리고 이슬을 받을 만한 잎이 갖추어져야 이슬 한 방울이 만들어진다. 마침내, 그리고 기필코 한 방울의 이슬이 맺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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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뜨거워지기 전 이른 아침에 만들어져 미세한 바람에도 떨고 있는 이슬이 영롱히 살아 있는 나라면, 그 이전에 어떻게 내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타자와의 "접촉"이고 "연결"이다. 그러니까 사랑이고 자비다. "당신이 기쁠 때 왜 내가 반짝이는지 알게 되는/이슬의 시간"이다.
이슬의 순간이 자칫 찰나적이라 덧없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이루어지는 시간은 지나치게 짧지도, 영원처럼 길지도 않습니다.
우린 영원과 찰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현재',
길이를 특정할 수 없는 시간에 존재합니다.
사랑의 단위는 시간이 아니라 '있음과 없음'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있음'에만 있을 뿐이죠.
사랑하는 시간에 집에 돌아갈 막차를 떠올렸다면
그날 아무리 화려한 데이트가 있었다 해도
결국엔 '사랑이 없었다'는 처절한 결론에 이르고 말 겁니다.
사랑이 '있기' 위해선
"영원하지도 순간적이지도 않은 바로 그 존재들과 제대로 관계" 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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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뒷부분에는
집착에서 벗어나 주인이 되는 과정에서 필요한 철학적 명제가 동서양 철학사의 일화로 소개됩니다.
강신주 작가의 '달콤한' 사랑 인문서가 다시는 없을 것 같아, 저도 이 책과 '영원하지도 순간적이지도 않은' 시간을 좀 더 절실하게 바라보고자 합니다.
이상,
시와 강아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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