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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인문학/시집 읽기

한명희 시인 - 두 번 쓸쓸한 전화

by 시와강아지 2020. 10. 25.

쓸쓸함을 생각하며 더 쓸쓸해졌을 


한명희 시인을 상상해봅니다.


마음이란 게 참 이상해요.



논리를 쫙 갖춰서 쓴 정보성 글이나


자기계발서에는 좋은 말 투성인데도


흠이 보이고



허름하고 찌질하고 외로운 시에는


완벽함이 보입니다.




히스테릭하고 외로운


외로워서 더 '뾰쪽뾰쪽'해지는 사람


한 때 그러했던, 어쩌면 여전히 그러할


시인 한 명을 읽어봅니다.



2002년,


칩거하는 그녀 그리고 그녀의 시는


햇빛을 보고 싶었습니다.







두 번 쓸쓸한 전화



시 안 써도 좋으니까

언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조카의 첫돌을 알리는 

동생의 전화다


내 우울이, 내 칩거가, 내 불면이

어찌 시 때문이겠는가


자꾸만 뾰쪽뾰쪽해지는 나를 어쩔 수 없고

일어서자 일어서자 하면서도 자꾸만 주저앉는 나를 어쩔 수 없는데


미혼,

실업,

버스 운전사에게 내어버린 신경질,

세번이나 연기한 약속.

냉장고 속 썩어가는 김치,

오후 다섯 시의 두통,

햇빛이 드는 방에서 살고 싶다고 쓰여진 일기장, 


이 모든 것이 어찌 시 때문만이겠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

한번도 당당히 시인이라고 말해보지 못한 시

그 시, 때문이겠는가




지나간 애인을 붙잡아도 봅니다.


무려 세 번씩이나


그는 분명 따뜻한 차를 우릴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녀 앞에서는 강바람을 맞아 차가워진 표면만을 보이는 '선착장의 자판기'와 같습니다.



끝이라는 말



더 이상은 넘겨볼 페이지가 없다는 것

아무리 동전을 쑤셔 넣어도

커피가 쏟아지지 않는다는 것

나도 모르게 세 가지 소원을

다 말해버리고 말았다는 것

그래, 그래서

등불도 없이 밤길을 나서야 한다는 것

끝이라는 것

막 배가 떠나버린 선착장에서

오래도록 시간표를 들여다보고 서 있는다는 것

오래도록 시간표를 떠나지 못한다는 것


'배가 떠나버린 선착장'


'더는 넘겨볼 페이지가 없다는 것'


것. 것. 것. 으로 운을 맞춘 시어는 다소 진부하지만



정말 배가 떠나버린 밤 선착장에서


강바람을 맞으며 다음 배를 기다려본 이에게는


다르게 읽힙니다.



때론 아침을 기다리며 


추운 야영을 해야하는 이유입니다.



그와 그날 밤 선착장은 


그녀를 단련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릇은 너무나 쉽게 금이 간다



이 그릇은 너무나 쉽게 금이 간다


막 빚어놓은 점토였을 때

그때부터 이 그릇은

밑바닥이 너무 좁았는지도 모른다

위쪽이 너무 무거웠는지도 모른다

장식을 너무 달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그릇은 몇번이나 불가마에 들어갔던가

그릇 저 깊은 곳

그림자까지 말려버리는

섭씨 3천도 불의 단련!


그. 러. 나.

이 그릇은 너무나 쉽게 금이 간다

눈빛, 눛빛에 찔려서 금이 가고

목소리, 목소리에 긁혀서 금이 간다

그릇과 그릇이 닿을 때마다

너무나 요란한 소리가 난다.



그럼 뭐합니까!


너무도 힘들었는데, 그 뜨거운 불가마에


내 앞의 당신에게도 뜨거웠을 불가마에


우린 모두 단련되었는데,


서로가 만났을 땐 긁거나 금이 갑니다.



너의 슬픔은 너에게만 뜨거웠을 뿐


나는 내 살점만 아파할 뿐이므로.


시를 읽지 않는 자들의 무리는


점점 신경증적이 되어갑니다. 


심지어 시를 쓰는 그녀조차 그렇게 되고 있는 


자신을 고백합니다.




시인에게, 당신의 말은 너무나 아픕니다.



내 몸을 관통한 모든 것은 구부러진다.



다음에 다시 한 번 오라는 당신의 말이

내 귀에 들어와서는 베베 꼬였다


당신이 흘깃 쳐다보던 손목시계가

내 눈에 들어와선 백 배로 확대되었다


분명코, 분명코 따스했을 당신의 미소가

내 피부에 닿아선 차갑게 식어버렸다


잘가라고 내미는 당신의 손이

칼처럼 나를 깊이 찔렀다 깊이


퍼렇게 멍든 말들이

내 몸 밖을 튀어나와서는

고맙습니다

온몸으로

고맙습니다

그것도 두번씩이나!


아무튼, 나는, 뒤틀려, 있는, 것이다




'퍼렇게 멍든 말'들이 


고작 '고맙습니다'라니.


그녀는 두려웠을 겁니다.




가장 무서운 것



천천히 움직이는 것은 무섭다

(가령, 개미보다는 송충이 같은 것


천천히 움직이면서도 부드러운 것은 더 무섭다

(뱀의 경우가 그렇다


천천히 움직이면서 부드러우면서 형체가 없는 것은 더욱 더 무섭다

(안개,

특히 밤안개......


형체가 없으면서도 부드럽고 부드러우면서도 천천히 움직이는 것 그런 것들은 모두 무섭다.


천천히 부드럽게 말하는 얼굴 그러면서 표정을 러내지 않는 얼굴 그런 얼굴은 무섭다 정말 무섭다




심리학에서 쓰는 용어였었던가요.


"불쾌한 골짜기(Unccany Valley)"라고 하는 말이 있답니다.


로봇이 인간을 어설프게 닮을수록 오히려 불쾌함이 증가한다 (나무위키)


사람과 아주 다른 형체의 괴물은 


차라리 덜 징그럽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사람 같지 않을 때 


치가 떨리는 불쾌함과 두려움을 경험합니다.



천천히 움직이는 송충이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파충류의 행동을


사람이 따라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퇴행을 암시하는 걸까요




바나나 가게 바나나는 시들어간다



바나나 가게 바나나는 시들어간다. 한때


가게를 환하게 했던 꽃

같은 바나나, 손 같은 바나나, 야구

글러브 같은 바나나가 점점 시들어

간다


나무에 달린 열매였을 때,

왕관 같고, 3층짜리 탑 같았던

바나나, 위풍도 당당했던 그 바나나가


바나나를 쿡쿡 찔러보던 아가씨

ㅡ너무 물컹물컹해

구두소리 요란하게 사라져 버린

후,


그믐달처럼 야위어간다 무말랭이처럼

비틀어져간다 깍아 놓은 사과처럼

갈변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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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희 시인의 시집 '두 번 쓸쓸한 전화'는


내용 상 두 챕터로 나뉘는데


그 중 앞부분의 현실적이고 외로운 느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참고로 뒷챕터의 내용은 

좀 더 포용적이며 회상적이라

더 따뜻한 느낌이 납니다.



이 시집은 2002년에 나온

한명희 시인의 초창기 시집입니다.


이후 2018년까지도 새로운 시집을 내며 

활동을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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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란, 다르게 또 같이 있을 수 있다는 희망"


시를 전하는 시와 강아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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