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끝나고 다시 해외여행이 가능하려면 2023년은 되어야 한다는 예측이 있어요.
못 먹는 떡이 맛있는 법
사실 여행은 지금 당장에라도 가능한 것인데
놓지 못하는 일상과 작은 욕심이
맛있고 예쁜 떡의 환상을,
힘이 되는 그 멋진 환상을 지웁니다.
'여행하지 못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
첫째, 물리적인 제약
둘째, 여행하려는 마음가짐의 제약
물론 저는 후자에 속합니다.
그래서 여행하는 시인의 시가
더 부럽고 아픕니다.
나는 왜 홀연히 떠나지 못하는가
왜 걸음으로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가
.
.
『7초간의 포옹』은 시인이 하고 있는
'사과 여행' 시리즈의 일환입니다.
신현림은 여행하는 시인.
세계 곳곳에서 사과를 던져올린 사진을
시와 함께 전시합니다.
시집에도 그녀가 던진 사과사진이 흑백으로 실렸어요.
시집을 쓴다 한들
시인의 속마음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시집 읽기'는
'시인과의 저녁 식사 한 번'
이번 식사가 맛있으면
다음 식사가 기대되고
생각과 다른 상대가 나왔다면
내일은 다른 이와 저녁을 먹으면 되겠지요.
내일도, 내일도, 또 내일도 알아가고 싶은
저녁 상대를 발견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
.
신현림 시인은 '사과'를 상징적으로 이용하는데,
아마도 그것은 "향기롭고 따뜻하지만
동시에 진리를 머금은 존재"의 은유입니다.
뉴턴의 진리 탐구가 '사과'로 함축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베어먹은 사과' 브랜드는
무언가 쫌 안다하는 사람이 쓰는 브랜드 이미지로 소비된다는 것이 참 공교롭죠.
아프도록 아름다운 것을 보러
나는 이곳에 왔다.
짐승과 사람들이 어울려 물 마시는 곳
빛과 물을 따라
마냥 흘러가다 함께 밥 지어 먹는 곳
사랑이 시작되는 한 편의 시를 만나러 왔다
언어의 배는 좋은 상상력을 만나 춤추듯이 나아간다
상상력이 없는 예술은 늘어나지 않는 고무줄
상상력은 나의 구석방
상상력의 둥지에
아픈 세상을 누여라 나는 발톱을 키워라
잠든 머리는 말같이 달려라
아카데믹한 말이여 인식이여 독수리처럼 날아라
녹색 벌판이 사자의 등처럼
끝없이 굽이치는 시를 나는 써야겠다
애 낳은 여인같이 내 몸은
뒤척이는 바다를 향해 열려 있다.
가끔 그런 날이 있습니다.
어쩌면 운동을 하다 Runner's high 를 경험하는 느낌과 비슷할까요
'내가 세상에 열려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아마도 시인은 이 시가 떠오른 날의 초저녁,
한참을 걸어 올라간 언덕에서
뻥 뚫린 시야를 보게 됐을지도 모릅니다.
함께 어울려 밥을 지어 먹고
상상하며 춤을 추고
아픈 이를 누이는 한편,
날카로움의 발톱을 키우기도 하는
짐승의 밸런스를 지닌 사람의 시.
그러한 시를 떠올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녀도 골방에 갇힌 어리석음을
모를 리 없습니다.
울음 상자
누워서 책을 읽고
누워서 유튜브를 보고
누워서 가늘게 흔들리는 커튼을 보며
내 상상력의 커튼을 열어 간다
커튼을 열면 우르르 쏟아지는
한여름 눈보라가 나를 즐겁게 한다
작은 눈보라는 작은 농담일지 모른다
이 시대는 심각한 진담이 되어
우리는 다른 피부를 갖는다
때로 만나기도 힘들어진다
달라서 멀어지는 일은 작은 죽음이다
우리는 이래서 끊어지고 저래서 끊어지며
작은 눈송이 같은 죽음을 키워 간다
혼자가 제일 편하다고 거짓 위로를 한다
눈보라가 한바탕 휩쓸고 가면
침대와 결혼한 사람처럼
그저 눕는 게 제일 편하다면서
천천히 장작같이 말라 갈지 모른다
화장장에 어울리는 땔감으로
사라지기에 안성맞춤인 땔감으로
나는 상대를 '작은 눈보라'처럼
귀엽고 '작은 농담'으로 바라봐 줄 수 있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는 게 시인이 커튼 사이를 바라보며
얻어낸 결론입니다.
시인과 같은 우린
'심각한 진담'으로 벽을 쌓고
'달라서 멀어지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렇게 침대 외의 모든 심각을 혐오하며
땔감으로, 안성맞춤인 땔감으로 되어갑니다.
사라지기에 안성맞춤인.
다행히 시인은 위로의 말을 찾아냅니다.
기묘한 욕조
방에만 있으면 방은 욕조가 돼
집 앞만 나서도 세상은 환하고 넓은데
욕조에 갇혀 외로워 떠는 이는
남에게 손을 내미는 이보다
심장 발작으로 죽기가 쉽다지
문제는 심장이 멈추기 전에 자살을 한다는 거야
텅 빈 복도에 빛이 쏟아지듯
쓸쓸한 삶이 덜 쓸쓸할 수 있는데
방법을 못 찾은 채 어둠 속을 헤매니 어떻게 할까
너와 나의 인연만큼
이 기묘한 생의 여행을 마치려는
너에게 어떤 위로를 할까
장기 기증하고나 죽지, 농담할 수도 없고
우연히 마주치는 이에게 연꽂 같은 미소는 지어 봤나
무거운 생의 철문을 닫을 만큼
죽어라 살아는 봤나 물을 수도 없고,
욕조 밖에는 강아지가 뛰고 해가 구르는데
욕조 밖으로 나오면
사람 사이 흐르는 강쯤은 쉽게 건너뛸 텐데
작아지는 욕조가 바다가 되게
너의 슬픈 눈동자에 비를 내리고
네 어깨에 가벼운 날개를 달아 주면
욕조 밖의 햇살을 받고
너는 다시 일어설 텐데
위로를 건네는 사람은 사실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싶었던 겁니다.
남의 흠을 잡는 이는 사실
자신의 흠을 잡고 있는 겁니다.
시인은 생이
무거운 철문 만큼 캄캄하다는 것도 압니다.
욕조 밖의 햇살 같은 위로를 받고 싶기도 합니다.
이 시에서
구원하는 이는 스스로 구원을 받습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스스로를 더 잘 위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쯤에서 시집의 제목이 다시 떠오르죠.
'포옹'은 상대를 따뜻하게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따뜻하게 합니다.
뜬 구름 잡는 것과 같은 결론이라구요?
맞습니다.. 현실에서 적용하기란 쉽지 않죠.
시인도 그러했습니다.
바로 사춘기를 관통하던 딸과의 소통에서 말이죠.
쓸쓸한 유리병
사람들은 저마다 유리병에 갇힌 듯
자기 말 외에 들을 수 없게 된 건 아닐까
서로 기댈 수도 없이 쓸쓸한 유리병에 갇혀
혼자 웅웅대는 모습이 나고, 너인 듯하구나
아무리 두들겨도 열리지 않는 문처럼
네 얘기를 안 듣는 게 아니라,
못 들을 만치 힘든 때가 요즘이란다
이것만 알자꾸나
세상에 변치 않는 사실 하나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과
떨어져 있을 때조차 함께 있음을
누구나 완벽하지 않고
울고 싶을 때라도 못 우는 이유가
쓰러지면 안 될 "엄마"여서란다
소통은 따뜻함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사춘기 딸에게서 '심각'한 벽을 경험한 시인은
무너지지 않기 위한 이유를 찾아냅니다.
그녀는 "엄마"입니다.
반대로 이해해도 좋을 듯합니다.
소통이란 "엄마"됨의 각오쯤은 있어야
비로소 겨우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요.
'중력'은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라
'알아서 그러하게 되는 힘'입니다.
그러니 인간인 우리는 어여쁘고 빨간 사과를
'중력에 역행하여 '던지고 있는 겁니다.
그녀의 '사과 던지기' 시리즈는
바로 중력에 역행하는,
소통하려는 다짐의 은유로 이해됩니다.
그러니 우리 다시,
포옹을 해야지요.
포옹이 주는 위로
우리는 꼭 껴안았다
껴안을 땐 서로 부드러운 스펀지가 되어
서로의 염려와 슬픔을 빨아들인다
우리가 껴안는다는 건
나는 네 안에 있어
언제 어디서든 외로워하지 말라는 뜻
기쁨은 함께 나눌 때 배가 되니
같이만 있어도
행복이란 고래가 하늘로 날아오른다
누군가 혼자 있을 때
말해 보는 것
"이리로 와 함께 얘기해요."
사람은 그저 누군가가
옆에 있기만 해도 살아갈 수 있다
고래가 하늘로 날아오른다.
당신, 사과는 물론
고래도 날아오르게 할 수 있는 사람인 걸요
.
.
.
.
.
"시란, 다르게 또 같이 있을 수 있다는 희망"
시를 전하는 시와 강아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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